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문단 편집) === 자녀들 ===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아내 마리아 바르바라(m. 1684–1720), 안나 막달레나(m. 1721–1750)와 함께 평생 동안 20명의 자녀를 낳았다. 그의 첫 번째 아이는 바흐가 23세였던 1708년에 태어났으며, 57세였던 1742년에 마지막으로 딸이 세상에 나왔다. 그 중 10명 만이 성인이 되어서도 살아남았다. 바흐 가문은 항상 악기로 가득 찬 집을 가진 음악가 집안이었고 요한 제바스티안은 항상 아내와 아이들, 그리고 그들이 살고 있는 공동체를 위해 곡을 작곡하는 데 열심이었다. 바흐는 [[아들바보]], [[딸바보]]였으며 교육열도 대단해서, 친구에게 “아무래도 쾨텐 궁정악장 자리를 그만두고 라이프치히로 가야겠어. 라이프치히 대학을 목표로 아들 녀석 공부를 시켜야겠으니” 하고 말할 정도였다.[* 바흐 생애 항목에 있는 에르트만에게 보낸 편지 참조.] 실제로 바흐의 첫째와 둘째아들은 당시 명문 대학인 [[라이프치히 대학]]에 진학하기도 했다. 바흐는 자신의 아들들에게 "음악가로서 귀족, 왕족들에게 하인 취급받지 않으려면 학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충고하였다. 바흐는 자식들의 음악 교육에도 관심이 많았다. 정기적으로 가정 음악회를 열어 음악을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으며 그의 장남이 10살이 되던 1720년에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를 위한 소품집’을 작곡하여 그의 아들에게 선사하기도 한다. 이 작품은 교육을 위해 작곡된 것이었다. 그의 가문이 200년간 약 60여 명의 작곡자를 배출한 뛰어난 음악 가문이기도 하였지만 그의 자식들 중에는 걸출한 인물이 3명이나 있다. 장남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와 특히 둘째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는 전고전주의 양식을 이끈 감정과다양식의 대가였으며 가장 유명했던 막내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는 런던 바흐라고도 불리며 그의 부친인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가 재조명되기 전에는 당시 ‘바흐’라고 하면 차남 엠마누엘과 동시에 이 인물이 지칭될 만큼 아버지 보다 더 유명한 작곡가였으며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와의 우정이 매우 깊었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8살 모차르트는 크리스티안에게서 작곡법을 배웠으며, 건반 앞에서 크리스티안의 무릎 위에 앉아 그와 함께 연탄곡을 연주한 적도 있다. 크리스티안은 모차르트처럼 돈은 그럭저럭 벌었지만 관리엔 능하지 못했던 듯 하다. 비서가 돈을 몽땅 횡령하고 튀는 바람에 말년에 가난과 빚더미에 시달리다가 47살이라는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모차르트는 그의 사망 소식을 듣고 "음악계의 커다란 손실"이라고 탄식하였다고 한다.[* 아버지에게 보낸 1782년 4월 10일자 편지.] ---- * 장녀 카타리나 도로테아 바흐 (1708–1774) 바흐의 첫 아이. 작곡은 그 당시 여성들에게는 선택사항이 아니었지만, 카타리나는 가수로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종종 아버지의 일을 도왔다. * 장남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 (1710–1784)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작곡가 되었다. 문서 참조. * 차녀 마리아 조피아 바흐 (1713), 차남 요한 크리스토프 바흐 (1713) 바흐의 셋째와 넷째 자녀인 쌍둥이는 바흐가 28세였던 1713년 2월 23일에 태어났다. 요한 크리스토프는 태어난 지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죽었고, 마리아는 몇 주 후인 1713년 3월 13일 경에 죽었다. * 3남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 (1714–1788) 바흐의 자식 중 가장 음악적 재능이 뛰어난 작곡가였다. 모차르트는 C.P.E. 바흐에 대해 "그는 아버지고 우리는 아이들"이라고 말했다. 문서 참고. * 4남 요한 고트프리트 베른하르트 바흐 (1715–1739) 1715년 5월 11일에 태어났으며, 형제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전문 음악가가 되었다. 그러나 그들과는 달리 대학에 갈 기회가 없었고, 법학을 공부하기 위해 비밀리에 음악 활동을 포기했다. 그는 24세의 어린 나이에 죽었다. * 5남 레오폴트 아우구스투스 바흐 (1718–1719) 11월 15일에 태어난 바흐의 7번째 아이는 짧은 10개월 동안 살았고, 1719년 9월 29일에 묻혔다. 그의 대부인 왕자가 [[레오폴트]]라고 이름지었고, 1717년에서 1723년 사이에 바흐를 카펠마이스터로 고용했다. * 3녀 크리스티아나 조피아 바흐 (1723–1726) 바흐의 아내 마리아 바르바라가 죽은 후, 그는 안나 막달레나 빌케와 결혼했다. 그들의 첫째 딸은 1723년에 태어났고, 같은 해 바흐는 라이프치히에서 토마스칸토르가 되기 위한 계약을 맺었다. 크리스티아나는 3년 후에 죽었다. * 6남 고트프리트 하인리히 바흐 (1724–1763) 고트프리트는 어떤 면에서는 약간 정신적으로 장애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징후는 어릴 때부터 포착됐다. 다행히 그에게는 많은 형제자매가 있었고 그를 보살펴줬다. 그의 형 C.P.E. 바흐는 그의 동생이 '발달하지 못한 위대한 천재'를 보여줬다고 말했다. * 7남 크리스티안 고틀리프 바흐 (1725–1728) 비극적으로 단명했던 크리스티안 고틀리프는 겨우 3년 밖에 살아남지 못했다. 그는 1728년 9월 21일에 죽었다. * 4녀 엘리자베트 율리아나 프리데리카 바흐 (1726–1781) 1726년은 바흐 가문의 기쁨과 비극의 해로, 엘리자베트가 태어난 지 2달 만에 언니 크리스티아나가 3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엘리자베트는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았고, 아버지의 제자 중 한 명인 독일의 오르가니스트 요한 크리스토프 알트니콜과 결혼했다. * 8남 에르네스투스 안드레아스 바흐 (1727) * 5녀 레기나 요한 바흐 (1728–1733) * 6녀 크리스티아나 베네딕타 루이스 바흐 (1729–1730) * 7녀 크리스티아나 도로테아 바흐 (1731–1732) 어린 시절에 죽은 이 4명의 자녀들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 9남 요한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 바흐 (1732–1795) 그는 6월 21일 태어났다. 바흐의 삼촌과 바흐의 큰형도 모두 요한 크리스토프라고 불렀다. 덜 혼란스러운 것은, 그가 전문적으로 하프시코드를 연주했던 로어 작센의 한 마을의 이름을 따서 '뷔케부르크 바흐'라고 부르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 이전의 많은 바흐 형제들처럼, 그는 이탈리아 음악의 유행에 영향을 많이 받은 작품을 쓴 고전 작곡가였다. 그는 런던을 방문하여 몇 편의 작품을 출판하기도 했지만 오늘날 그의 음악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의 장남 빌헬름 프리드리히 에른스트 바흐(1759년–1845년)는 J.S. 바흐의 외손자로 작곡가로서 명성을 얻었다. 그는 프로이센의 프레데릭 윌리엄 2세의 음악 감독이었다. * 10남 요한 아우구스트 아브라함 바흐 (1733) 어린 요한 아우구스트는 11월 5일 세례 후 하루 후에 사망했다. * 11남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 (1735–1782) '영국 바흐'로 알려진 J.C. 바흐는 이탈리아를 여행하여 [[가톨릭]]으로 개종한 뒤 샬롯 여왕의 봉사로 런던에 정착하여 별명이 '런던 바흐'이다. 그는 유명한 클래식 작곡가가 되었고, 모차르트의 협주곡에 영향을 주었다. 문서 참고. * 8녀 요하나 카롤리나 바흐 (1737–1781) * 9녀 레기나 주자나 바흐 (1742–1809) 바흐의 19번째와 20번째 아이들, 두 딸 모두 결혼하지는 않았다. 요하나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레지나는 [[루트비히 판 베토벤]]과 친분이 있었다. 그는 심지어 베토벤에게 기부할 교향곡 3번의 시사회 수익금까지 요구했다. 그녀의 유명한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수집품이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가난하게 죽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